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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지휘자, 미셸 플라티니 – 프랑스를 정상에 세운 남자

브브라이언CS 2025. 6. 14. 09:30

Photo by Chris Karidis on Unsplash

 

 

 

어릴 적 미셸 플라티니는 항상 축구관련 서적에서 아름다움, 예술, 이런 단어들이 빠지지 않던 선수였다 축구 역사 속에서 특유의 감성과 이성, 정교함이 공존했던 선수이다. 그가 지닌 진짜 가치는 기술보다는 판단, 창조력보다는 효율, 감각보다는 이해력에 가까웠다. 플라티니는 선수로서 프랑스 축구의 전환점을 이끌었고, 유럽 무대를 지배한 인물 중 하나였다.

 

1. 프랑스 동부 낭시에서 출발한 플라티니

 

플라티니는 1955년 6월 21일, 프랑스 동부의 낭시(Nancy)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재능을 보였고, 지역 클럽인 AS 낭시에서 프로 데뷔를 하며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는 곧 팀의 중심이 되었고, 중거리 슛과 정교한 프리킥 능력으로 리그1 내에서 빠르게 주목을 받았다. 낭시는 플라티니의 존재 덕분에 한동안 경쟁력 있는 팀으로 평가받았으며, 그는 선수 개인으로도 프랑스 내 유망주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2. 생테티엔에서의 짧은 활약

 

플라티니는 1979년, 프랑스의 명문 클럽 AS 생테티엔으로 이적한다. 생테티엔은 당대 유럽에서도 경쟁력 있는 팀 중 하나였으며, 플라티니는 이적 첫 시즌부터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유럽대항전에서의 기대만큼 성과를 내진 못했고, 팀과의 궁합도 이상적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플라티니 개인에게는 더 넓은 무대, 더 큰 전술적 자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그는 1982년, 자신의 커리어를 바꿔놓을 팀으로 떠난다.

 

3. 유벤투스 – 전성기의 중심

 

1982년, 플라티니는 이탈리아 세리에A의 강호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당시 세리에A는 마라도나, 지쿠, 루메니게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모여 있던 최고의 무대였고, 플라티니는 이곳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로 거듭난다. 그는 유벤투스에서 3년 연속 발롱도르(1983, 1984, 1985)를 수상했고, 세리에A 득점왕에도 3회(1983~1985) 올랐다. 이는 미드필더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이며, 그만큼 그의 위치 선정, 패스 타이밍, 침투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또한 1985년에는 유벤투스의 유럽 챔피언스컵(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끄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승전에서의 결승골은 결과적으로 그 경기의 유일한 골이자, 플라티니의 유럽 커리어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4. 유로 1984

 

프랑스를 유럽 정상으로 플라티니의 이름이 단순한 스타를 넘어 ‘상징’이 된 결정적 계기는 UEFA 유로 1984였다. 프랑스는 자국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전승 우승(프랑스는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참 강한 모습을 보인다)을 차지했고, 플라티니는 5경기 9골이라는 믿기 어려운 기록을 남기며 득점왕이자 MVP로 대회를 지배했다. 그는 당시 전성기였던 장 티간나, 알랭 지레스, 루이스 페르난데즈와 함께 ‘마법의 마름모(Magic Square)’로 불리는 중원을 구성했고, 프랑스 축구 역사상 첫 메이저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유로 1984는 플라티니 개인에게도, 프랑스 축구 전체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 무대에서 지속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 시작에는 플라티니가 있었다.

 

5. 은퇴와 감독 생활

 

플라티니는 1987년, 32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비교적 이른 은퇴였지만,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선수로서의 마무리였다. 은퇴 후 그는 곧바로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는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대표팀을 이끌었고, 유로 1992 본선에 진출하긴 했지만 조별리그 탈락으로 실질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후 지도자 경력보다는 행정가의 길로 방향을 틀게 된다.

 

6. UEFA 회장으로서의 명암

 

2007년, 플라티니는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에 선출되며 행정가로서도 국제 무대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유럽 대회의 공정성과 지역 축구 균형 발전을 강조하며 대형 클럽 중심의 유럽 축구 운영을 조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2015년, FIFA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며 6년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고, 결국 UEFA 회장직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그가 추진하던 정책들의 일부는 UEFA에서 계승되었지만, 개인의 이미지에는 분명한 타격이 있었다.

 

7. 플레이 스타일과 평가

 

플라티니는 빠르거나 피지컬이 강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의 축구는 “빠르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연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확한 프리킥, 위치 선정, 2선 침투, 그리고 경기 전체의 흐름을 읽는 능력은 동시대 어떤 선수보다도 뛰어났다. 화려함보다는 정교함, 감정보다는 조율에 가까운 스타일로 경기장의 중심에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선수였다. 그는 흔히 “축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했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는다.

 

미셸 플라티니는 축구 선수로서의 커리어만 놓고 보면,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선수 중 하나다. 그는 프랑스를 유럽 정상에 올렸고, 유벤투스를 전성기로 이끌었으며, 유럽 축구사에 남을 플레이메이커로 기억된다. 그의 축구는 단순히 공을 잘 차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전술, 흐름, 그리고 결정력까지 모두 갖춘 '사령탑형 미드필더'의 전형을 만든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