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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에릭”, 축구장을 넘어 전설이 된 남자 – 에릭 칸토나

브브라이언CS 2025. 6. 6. 11:48

Photo by Samuel Arkwright on Unsplash

그가 남긴 흔적들

 

나는 갈매기다.” 한 축구선수의 은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당신은 아마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에릭 칸토나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는 늘 예측할 수 없고, 늘 특별했다. 프랑스 출신의 이 공격수는 단순한 골잡이가 아니었다. 칸토나는 잉글랜드 축구의 한 시대를 바꾸었고, 지금도 여전히 “킹 에릭”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 있다. 오늘은 축구사에 길이 남을 이 예술가 같은 선수, 에릭 칸토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문제아

 

1966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칸토나는 어릴 적부터 반항심이 강한 아이였다. 축구에 있어서는 재능이 넘쳤지만, 그만큼 기행도 많았다. 1983년 AJ 오세르에서 프로 데뷔한 그는, 마르세유와 보르도, 몽펠리에 등을 거치며 프랑스 리그에서 실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징계와 분노 조절 문제로 프랑스 축구계에서는 그를 “다루기 어려운 천재”로 평가했다. 특히 님 올랭피크 소속 시절 감독을 향해 “쓰레기”라 말하고 은퇴를 선언했던 사건은 유명하다.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잉글랜드 무대로 옮긴 건, 어쩌면 축구 인생의 제2막이 아니라 그의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프리미어리그를 바꾼 남자

 

1992년, 칸토나는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잉글랜드 축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눈에 띄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된다. 이 이적은 단순한 영입이 아니었다. 26년간 우승과 인연이 없던 맨유를 부활시킨 혁명이었다. 칸토나는 유니폼의 깃을 세운 채, 마치 한 편의 연극을 펼치듯 경기를 지휘했다. 정확한 패스, 기발한 창의력, 예술적인 골, 그리고 리더십까지. 그는 단순히 팀을 이끄는 에이스가 아니라, 맨유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덕분에 맨유는 칸토나가 입단한 해부터 프리미어리그 4회, FA컵 2회 등 엄청난 업적을 이루게 된다.

 

칸토나와 퍼거슨, 유일무이한 관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칸토나를 두고 “내가 지도한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존재감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퍼거슨은 칸토나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칸토나 역시 감독을 절대적으로 존중했다. 두 사람은 선수와 감독을 넘어서 ‘정신적 지도자와 창조자’의 관계에 가까웠다. 팀 내 어린 선수들도 칸토나를 ‘경기의 예술가’로 여겼고, 이는 퍼거슨이 구단의 세대 교체를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팬들에게 영원한 왕, 킹 에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은 지금도 칸토나를 “킹 에릭”이라 부른다. 이는 단순한 별명이 아니다. 그의 골 세리머니, 특히 한쪽 깃을 세운 채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맨유 팬들에게 ‘지배자’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그가 나설 때마다 경기장은 술렁였고, 골을 넣는 순간은 마치 축제처럼 흘러갔다. 팀을 넘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그는 여전히 레전드로 남아 있다.

 

'쿵푸킥' 사건, 그리고 칸토나

 

1995년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관중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분노한 칸토나는 관중석으로 돌진해 지금도 회자되고 앞으로도 회자될 전설의  ‘쿵푸킥’을 날린다. 이 사건으로 그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징계를 받았지만, 오히려 그의 반항적 이미지와 예술가적 성격은 더 깊게 각인되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서사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축구는 예술이다 – 명언과 철학 칸토나는 경기 후 기자회견이나 인터뷰에서 예술가처럼 말하곤 했다. “갈매기가 고기잡이 배를 따르는 이유는, 그 배가 정어리를 던질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 한 문장은 기자들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지만, 칸토나답게 평범함을 거부한 말이었다. 그는 축구를 예술이라 말했고, 선수 생활 자체를 연기처럼 대했다. 단순히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남기려는 듯한 행위. 그것이 칸토나였다.

 

너무 빨랐던 작별, 은퇴

 

1997년, 그는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다른 선수들이 더 오래 뛰고 기록을 남길 때, 그는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무대를 내려왔다. 이 결단은 그의 커리어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고, 이후 예술과 사회활동으로 활동 영역을 옮기게 된다. 은퇴 후, 스크린과 사회로 은퇴 후 그는 영화배우로 전향하여 ‘Looking for Eric’, ‘엘리자베스’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단순한 연예계 진출이 아닌, 자신만의 철학과 감정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한 움직임이었다. 또한, 사회문제에도 목소리를 냈고, 프랑스 대선 출마, 빈곤 문제, 금융 구조 비판 등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상가적 면모도 보여주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기록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기록: 185경기 82골 66어시스트

주요 수상 내역: 프리미어리그 우승 4회, FA컵 2회, 커뮤니티실드 3회, FWA 올해의 선수상, 프리미어리그 명예의 전당 

 

국가대표로서의 칸토나

 

칸토나는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프랑스 내에서는 그의 반항적인 성격이 걸림돌이 되었다. A매치 출전은 45경기에 그쳤고 A매치 골은 20골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프랑스 국대팀은 월드컵 예선도 통과못하던 암흑기-1990이태리월드컵, 1994미국월드컵 예선탈락-로 이 시기의 프랑스 국대선수들의 커리어는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다. 칸토나의 재능은 이미 대표팀에서도 인정받았지만, 코치진과의 불화, 징계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축으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는 골을 넣지 않았다, 예술을 남겼다.”

 

칸토나는 프리미어리그에 프랑스풍의 세련됨과 상상력을 더했다. 그는 단순히 우승컵을 가져온 선수가 아니라, 맨유의 철학을 바꾼 인물이다. 지금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킹 에릭’을 외치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경기력만이 아니라, 팀과 팬을 향한 진심어린 헌신 때문이다. 그는 경기장에서 춤추듯 골을 넣었고,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침묵으로 세상과 대화했다. 그는 늘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확실한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해왔다.

 

에릭 칸토나는 “완벽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화려했지만 위태로웠고, 천재였지만 문제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그의 플레이는 여운을 남겼고, 그의 말은 지금도 인용된다. 그는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만 뛴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경기장 위에 섰던 예술가라는 말이 어울리는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