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축구의 역사는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은 메시 이외에도 수많은 재능으로 빛나는 나라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비에르 사비올라(Javier Saviola)는 메시 이전에 청소년 대회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한때 “포스트 마라도나”, “차세대 슈퍼스타”로 주목받았던 인물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리오넬 메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기대받는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많은 기대와는 달리 사비올라의 커리어는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 천재의 등장
사비올라의 유망주 시절 사비올라는 1981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리버 플레이트 1군에 데뷔하며 남미 축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곧바로 아르헨티나 리그 최연소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의 작은키(약 168cm)와 빠른 발놀림, 탁월한 골 결정력은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El Conejito(작은 토끼)’라는 별명도 붙게 되었죠.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는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차지하며 세계 무대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활약으로 인해 그는 유럽 명문 바르셀로나의 부름을 받게 되며, 모두가 기대하는 슈퍼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2. 바르셀로나에서의 날개짓과 한계
2001년, 바르셀로나는 사비올라를 약 3,500만 유로라는 거액을 투자해 영입합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한 금액이었고, 바르사는 그를 차세대 간판 스트라이커로 키우려 했습니다. 첫 시즌, 그는 라리가에서 17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적응을 보여줍니다. 빠른 스피드와 민첩한 움직임, 문전에서의 냉정한 마무리는 확실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감독 교체와 전술 변화가 사비올라의 입지를 흔들었습니다. 특히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체제에서는 사비올라의 스타일이 팀 전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고, 이후에는 임대 생활을 전전하게 됩니다. 모나코, 세비야,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까지. 이적과 임대는 그가 중심 선수가 아닌 ‘잠재력이 있는 백업’처럼 다뤄지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점차 그는 주목받던 천재에서 '떠도는 선수'로 이미지가 바뀌어갔습니다.
3. 사비올라가 재능을 다 꽃피우지 못한 이유
그렇다면, 왜 사비올라는 축구 천재에서 ‘성공하지 못한 선수’로 남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히 실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3-1. 피지컬 한계 vs 메시와의 비교
사비올라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스피드와 민첩성이었지만, 그의 작은 체구(약 168cm)는 유럽 무대에서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특히 당대 수비수들이 강조하던 피지컬 압박 속에서 그는 몸싸움에 밀리는 장면이 많았고, 플레이가 제한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리오넬 메시 역시 169cm의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비올라는 안 되었고, 메시는 되었을까요? 바로 이 점이 사비올라가 단순히 ‘작아서 안 된 선수’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메시는 단순한 스피드나 민첩성 외에도 극한의 볼 컨트롤 능력, 무게중심을 낮춘 드리블, 그리고 축구 IQ 측면에서 특별한 능력을 갖췄습니다. 특히 메시가 갖고 있는 공간 창출 능력, 전방 압박을 이겨내는 판단력은 단순한 기술 이상이었습니다. 또한,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체계적인 유소년 시스템(라 마시아)에서 성장하며,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최적화된 전술 아래에서 뛰었습니다.
반면 사비올라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성장한 뒤 유럽에 와서 전술적으로 이질적인 환경에서 부딪쳐야 했고, 팀이 그의 재능을 중심으로 꾸려진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즉, 메시와 사비올라는 비슷한 신체 조건을 가졌지만, 기술적 완성도, 전술적 지원, 심리적 안정성, 그리고 팀 내 위치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비올라가 메시보다 부족했던 것은 ‘신체 조건’이 아닌, 그 외의 복합적인 요소들이었던 셈입니다.
3-2. 전술과의 부조화
사비올라는 전통적인 스트라이커보다는 세컨 스트라이커, 혹은 전형적인 '골사냥꾼' 에 가까운 유형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많은 팀들이 더 강력한 피지컬을 갖춘 스트라이커나 전방 압박을 수행할 수 있는 포워드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또한, 바르셀로나는 그 시점에서 전술적 리빌딩을 진행 중이었고, 사비올라가 그 그림 안에 포함되지는 못했습니다. 감독이 자주 바뀌었고, 그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도 변화하면서 사비올라는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3-3. 지나치게 이른 기대와 심리적 부담
사비올라에게 쏟아진 기대는 그의 성장에 득보다 실이 많았다는 평가도 존재합니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마라도나의 후계자’, ‘세계 최고의 유망주’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거액의 이적료와 팬들의 높은 기대치를 감당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었고, 이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도 그의 성장을 저해했을 것입니다.
4. 말년과 조용한 은퇴
사비올라는 이후에도 레알 마드리드, 벤피카, 말라가, 올림피아코스 등 다양한 팀을 거쳤지만, 전성기 시절의 날카로운 모습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커리어는 점차 하향곡선을 그렸고, 30대 중반이 되던 시점에는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축구 선수로서 활동한 이후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축구 해설과 유소년 지도자로 활동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은퇴 이후 삶을 선택했습니다.
결론 ㅡ ‘만개하지 못한 꽃’의 아쉬움
사비올라는 분명 시대를 앞서는 재능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메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아르헨티나 출신 공격수는 드물었고, 그의 기술과 골 감각은 당시로서는 환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전술 변화, 피지컬의 한계, 그리고 심리적 압박 등 여러 요소들이 겹치면서, 그는 기대만큼의 커리어를 보여주지 못한 채 축구계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수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축구를 보여준 ‘작은 토끼’로 남아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만약 그때…’라는 가정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역시, 모든 일에 큰 성공은 재능만으로 되는 일은 없으며, 환경과 운도 따라야 합니다 물론, 노력은 기본이겠죠. 사비올라 선수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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